나를 처음 경제학을 이끌었던 경제학 용어는 pareto optimal이다. 이는 '어떤 것이 최적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즉 '최적'에 대한 정의다. 당시 교수님은 A와 B라는 임의의 정책과 각 정책에 따른 사회구성원 각각의 이득을 칠판에 적으시며 '나은 것'의 정의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셨다. 이 수업을 듣는 내내 이런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 만든 학문이 경제학이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하는 공부와 내가 가진 것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였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 경제학을 접했을 때 내가 찾던 것이다라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경제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때때로 내게 주식이나 환율에 대한 것들을 묻곤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흥미가 없을 뿐더러 잘 알지도 못한다. 이전에는 왜 나는 경제학을 공부한다면서도 경제를 모르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에 대한 답을 장하준 교수님의 설명에서 찾았다. 화학이나 생물학 등과 같이 연구대상으로 학문의 경계가 결정되는 분야와 달리 경제학은 연구대상으로 학문의 경계가 결정되지 않는다. 경제학은 연구방법을 고민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시경제학이든 거시경제학이든, 경제적 주체가 기업이든 사람이든 짚고 넘어가는 것은 최적의 선택이다. 경제학 이론에는 가정들이 많기 때문에 이게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된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수많은 경제학 이론들이 서로의 가정들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바뀌는 상황 속에서의 최적의 선택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대학원 첫 학기를 보내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나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는 일이었다. 명확하지 않은 목표지점과 명확하지 않은 현재 나의 상태를 버티는 이 지난한 과정은 어떤 공부를 하든 공부를 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 것 같다. 그러다 강성태 씨의 세바시 강연을 보게됐다. 강연자가 공부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 강조했다. 한 시간 한다고 두 시간 한다고 그 결과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제대로 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는 채로 그냥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문득 나 같이 인정욕구가 강하고 성격도 급한 사람이 이런 막연함을 버티고 있는 자체가 내 딴에는 거의 참사랑의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경제학 공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막연함은 필연적인 것이다. 요즘 나를 답답하게 했던 것들, 무기력하게 했던 것들이 이러한 점이었던 것 같다. 구체적인 사명감은 어느 정도 능력이 생겼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들지만, 현재의 나를 이끌어줄 일정 수준의 답을 내리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학문을 위해서 빈민가를 헤맸다는 알프레드 마셜의 모습이 답의 실마리인 것 같다. 옳은 것을 해야한다는 책임감이 나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기 위해선 옳은 일의 필요성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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