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학기 때 졸업생 선배들의 취업설명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 분은 한국 회계사와 미국 회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현재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고 다른 한 분은 행정고시 합격하신 분이었다. 대학원 준비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취업에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졸업생의 삶이 궁금해서 강연을 들으러 갔다. 그리고 당시 선배들의 조언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불안 속에서 중심을 지키는 큰 힘이 되고 있다.
두 선배의 공통점은 '고시'라는 불안함이 극대화 되는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여느 사람들과 같이 두 선배 역시 고시를 시작할 때는 인터넷 상에 올라와 있는 '반드시 해야하는 것'들을 찾는데 시간을 썼다고 했다. 잘 가르치는 선생님, 좋은 교재 등 합격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조사했다고 한다. 고시의 여정을 마치고 그들이 후배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합격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 나아가 어떤 일들의 대세를 결정하는 것은 이런 사소한 디테일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길이 열리는 이유는 우리의 노력과 신의 계획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필수적인 것'이 없다고 해서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와 관련된 성경 구절이 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다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이사야 31:1-3]
애굽은 현재의 이집트로 성경에서는 물질주의나 속세적인 것의 상징으로 쓰인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지배당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일화가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미루어보아, 위 구절에서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는 이유는 그들이 신에 대한 믿음(삶의 중심)을 잃고 말과 병거 같은 당장 눈에 보이는 힘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다시 선배들의 얘기로 돌아와서 그들이 타인이 말하는 것들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는 그들의 합격 과정이 남들과는 다른 상황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행시를 본 선배는 부모님께서 공부를 지원해줄 만한 여력이 없으셨지만 통일과 관련된 비전이 있었기에 반드시 행시를 봐야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행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4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완벽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선배가 붙잡고 있던 생각 하나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반드시 길은 열릴 것이라는 확신이었다고 한다.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대세를 결정하는 것은 주체적인 삶의 태도다. 우리가 어떤 도전을 할 때, 그 결정이 쉽게 흔들리지 않을 본인의 논리에 기반했다면 그 논리는 과정에서 오는 불안을 견디는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불안에 휩쌓인다고 주관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해결책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덧붙이자면 헨리포드는 이런 말을 했다. "If you think you can, or you think can't, you are right". 이미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도전의 한 걸음을 뗐다면 지금의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 이러한 맥락에서 '신'이라는 존재성이 굳이 필요한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주체성을 내 자신이 아니라 신에 기반함으로써 나는 더욱 굳건한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불안과 믿음을 다른 곳에 두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신실한 특성'을 믿는 것이다. 즉,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신의 특성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이 변함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흔들릴 수 있지만 믿음을 신의 신실하심이라는 변하지 않는 곳에 고정함으로써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얻게된다. 이는 마치 생각을 글로 적는 것이나 클라우드에 저장해두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 같다. 사람의 기억은 휘발되고 왜곡되고 컴퓨터나 핸드폰은 언제든 망가지지만 노트나 클라우드 같은 매개체를 통해서 우리는 보다 견고한 것을 가질 수 있다.
첫번째 이유가 이성적인 측면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두번째는 '감정'에 관련된 이유다. 과정 속에서 느끼는 부정적 감정들 우울감이나 무력감 혹은 좌절감들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또 다른 방해물이다. 이것을 보완하는 것이 신의 인격적인 특징이다. 기독교는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표현한다. 가장 근본적인 메세지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예레미야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말씀을 전하는 사람)로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말재주가 없는 자신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며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예레미야 1:6]' 라고 답한다. 이에 하나님은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중략)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중략)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예레미야 1:9]'.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두려움에 '함께하겠다'는 지지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는 응원으로 화답했듯이 성경 속의 신은 우리의 불안, 외로움, 우울함 등에 대해 위로를 보내거나 정서적 지지를 제공한다. 신의 이러한 역할은 우리가 스스로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 정진할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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