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부패가 해악의 단계를 넘어 사람을 죽이고 있다.
(중략)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조차 칼을 들지 않으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시간도 아니요, 돈도 아니다.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사람의 피다.
위는 드라마 비밀의 숲의 이창준이라는 인물의 유서의 일부다. 이 드라마는 여러 권력가들과 연관된 한 브로커의 죽음을 시작으로 부정부패의 뿌리를 캐내려는 주인공 황시목 검사를 포함한 살인사건의 특수전담팀과 당시 검사장이자 대기업의 사위인 권력가에 속한 이창준 청와대 비서실장 간의 묘한 대립에 대한 이야기다. 드라마의 마지막회에서는 권력가의 일부인 이창준이 모든 사건의 주도자임이 밝혀지는데 이창준의 부조리는 들킨 것이 아니라 들키기 위해 설계되었던 것이다. 이는 권력가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그의 계획이었고 이창준은 그 계획을 권력가의 일부였던 자신의 자살과 유서를 통해 완성하고자 했다.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사람의 피라는 작가의 통찰이 인상 깊었다. 최근에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구의역의 젊은 노동자와 김용균이라는 청년 노동자의 죽음으로 인해 산업안전보건법에 관심이 쏠리면서 2018년 전면적인 개정의 과정을 거쳤는데 이는 1990년 개정 이후 28년 만에 개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8년 통계 기준,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산재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연간 2000여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안전사고 및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한다.
죽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죽음은 무의미한 통계숫자처럼 일상화되어서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고
이 사회는 본래부터 저러해서, 저러한 것이 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죽음조차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나와 내 자식이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행운에 대해 감사할 뿐,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해간다
<빛과 어둠-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에 부쳐, 김훈>
한편 '속도전쟁'이라 불리는 현 시대는 편리한 삶이 더 나은 삶이라는 기준이 만연한 사회인 것 같다. 어떠한 불편도 손해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소유와 발전에 쫓기듯이 살아가는 데에 반해, 공감은 사람들이 그토록 피하고자하는 불편과 고통 속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사회의 빠른 발전과 풍요 이면에는 결국 공감이 결여된 사회를 향해 달음박질을 하는 모습이 있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하여금 생각의 범위가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되고 사회적 책임과 같은 공적인 영역의 것들을 둘러 볼 여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 책임에 대해 생각할 때면 제 아무리 뛰어난 농구선수라도 전쟁통에 태어났다면 그 재능은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라던 말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에는 후손들에게는 나라 잃은 설움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결의를 다졌던 3.1운동 세대가 있었고, 민주화를 쟁취한 세대가 있었고 인권을 위해 싸웠던 세대가 있었다. 내게 선대의 사람들처럼 대의를 위한다는 거창한 뜻과 희생정신은 없다. 다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사회적 책임은 거저 얻은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것,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것 등은 사람으로서의 도리의 수준이다. 이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은 금수가 아닌 인간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이며 인간의 삶을 살 때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이 성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스무 살 쯤에 한창 이런 질문들을 많이 던졌던 것 같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당시의 치기어렸던 생각들이 많이 떠오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는 게 새삼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 전의 생각을 다시 상기했으니, 사회에서 내 존재가 얼마나 크냐 작냐와 관계없이 나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책임을 위해 노력하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조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79590
[김용균법①] 28년간 잠자던 ‘산업안전보건법’을 깨우다 - 시사저널
소년은 충남 서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일하면 야간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상경을 결심했다. 1987년, 15살 때였다. 서울 영등포의 한 온도계 제조공장에서...
www.sisajournal.com
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9/labordeath/index.html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1748번의 죽음의 기록
오늘도 ‘3명’의 노동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죽음이 통계숫자로만 남지 않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기록했다.
news.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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