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마음 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까, 대답하지 않는
달은 더 빛난다. 즐겁다.
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 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같다.
그 때면 춤추던 마을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안에서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아, 당신이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어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지난 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이 보고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
시는 서툴고 맹목적이었던 어린시절의 사랑을 여름과 레몬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치 여름밤의 한 장면에 시인과 함께있던 듯이 생경한 심상을 가져다 준다.
허수경 시인의 글에는 늘 외로움이 묻어있다. 절절하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그에 덧입혀진 그만의 문체가 절절함을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특히나 좋았던 문장은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어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는 부분이다. 학구적인 문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던 이전과 달리 요즘에는 이런 문학적 표현들이 좀 더 내 마음을 울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치기어린 모습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멀어지는 만큼 그리워지기 때문인 것 같다. 맹목적인 열정, 사랑, 그런 감정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글들이 요즘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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