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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궤적

종교의 허무맹랑함

이전에 한 친구로부터 점집에 가는 것과 교회를 다니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뒷산에 나무나 바위에 대고 비는 것과 교회를 다니는 것의 차이를 물었다. 이 친구는 조금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종교를 갖는 것에 대해 허황된 것을 쫓는다는 식의 시선을 몇 번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은 아마 옛어른들의 물 떠다 놓는 기도처럼 '소원이 이뤄지는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종종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목격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믿는 일이고,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경 속에 쓰여있는 삶의 원리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원리는 실생활에서 선택의 기준이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함양하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기독교의 허무맹랑함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기적에 대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적이 의미하는 바이다. 단순히 기적에 대한 일화의 존재유무로 성경이 허무맹랑하다고 규정 짓는 것은 섣부르다. 성경에서의 이런 일화가 '초현실적인 현상을 바라며 살아라'라는 것일까?

 

성경에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마8:17-34, 막5:1-20, 눅 8:26-39)'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고 그 귀신을 내쫓은 일화다. 성경은 문화 속에 녹아든다. 그래서 성경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 때때로 당시의 문화나 사회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던 가다라 지방은 로마의 폼페이우스로 인해 정복된 지역인 데가볼리의 한 지방이다. 당시 로마의 통치 정책은 압제였다. 해당 지역은 압제로 인해 고통받던 마을 중 하나라고 한다. 잔혹한 압제 속에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고 가족의 죽음을 눈 앞에서 봐야 했던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설교를 전하시던 목사님께서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었던 시대라고 언급하셨다.

 

그래서 목사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라는 일화는 '마음을 고친 일'이라고 해석하신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의 한 면모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삶의 벼랑 끝에 놓인 사람들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귀신과 기적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시사하고자 하던 바는, 삶의 벼랑 끝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그들의 지치고 아픈 마음을 다독이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사랑과 긍휼한 마음이다.

 

성경을 통해 여태 배운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위의 일화가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고 있듯이, 여타 다른 일화들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의 삶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공부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삶의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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