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궤적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

오랜만에 집에 왔다. 온지 얼마 안돼서 추석연휴라 가족이 모두 집에 있었는데 엄마는 연휴 내내 집 안의 물건들을 당근마켓에 파느라 바빴다. 설마했는데 역시나, 엄마는 집에 있는 좋지만 안 쓰는 물건들을 헐값에 팔고 있었다. 내가 물건을 판다면 가격 책정의 기준이 정가일텐데 엄마는 안 쓰는 물건이라는 이유로 기준이 0원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헐값에 파는 것도 모자라 물건을 가져간 사람이 기대와 다르다고 느끼진 않을지, 가져갈 때 불편하진 않을지 물건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꼼꼼히 포장을 마치는 모습을 보면 수고비 빼면 그냥 공짜로 주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이런 엄마의 모습이 늘 답답했다. 사람과의 일에서는 대충이 없고 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정이 넘쳤다. 그러다보니 사람 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딸의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이 전혀 달가울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닮아있었다. 누구를 만나도 친밀도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에너지도 많이 쓰고 관계의 맞춰지지 않는 균형에서 허덕였지만, 그 시간들을 종합해보면 그저 주변사람들을 많이 챙기는 애, 그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허무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엄마로부터 보고 배운 이 삶의 태도가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흔드는 이유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친구들이었던 이유도 있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실망이 때때로 그들이 무언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삶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나 혼자만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는 모습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엄마로부터 배운 이 마음 씀씀이를 고쳐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불현듯 이 모습이 내 삶을 이끌어 온 방향키였다는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밑도 끝도 없이 사회적 소외계층을 돕는 사람들이 되고 싶다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생각이 스물 여섯이 되기까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었다. 전공 선택의 이유였기도 했고, 휴학을 결심한 이유였기도 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었고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맥락없이 떠오른 가벼운 생각이었다면 10년이란 시간의 어딘가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그것은 엄마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따뜻한 마음의 가장 큰 수혜자인 내가 언젠간 마땅히 이어받아야 할 것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모습이 내 삶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더이상 손해보고 마음 상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더라면 이제는 지치지 않고 이 삶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일 것 같다.

'삶의 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0) 2020.08.31
[詩] 청춘의 기습, 이병률  (0) 2020.07.25
요즘 지키고 싶은 것  (0) 2020.06.28
종교의 허무맹랑함  (0) 2020.05.03
[묵상]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0) 2020.04.17